벼루의 미학
차고 깨끗한 물로 잘 씻어 정갈한 벼루에 먹을 갑니다.
빠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먹을 갑니다.
창 밖에 달뜨고 매화라도 살포시 피어준다면 더욱 좋겠지요.
차가운 돌덩이와 검은 먹은
서로 몸을 부비면서 서로를 받아들입니다.
만나 어우러지는 소리는 언제나 사각사각 차분하고 은근합니다.
벼루와 먹은 서로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 줍니다.
먹이 갈림에 따라 벼루도 갈립니다.
만약 벼루가 지나치게 단단하면 먹은 갈라지지 않습니다.
또 먹이 너무 무르면 벼루는 제 구실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벼루는 먹을 받아들이고 먹은 벼루에 의탁합니다.
이런 만남을 통해 벼루는 윤기를 찾고 먹은 향내를 품게 됩니다.
그윽한 향기는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인 결과인 셈이지요.
사실 본래 벼루에도 먹에도 향기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 둘의 아름다운 만남을 귀하게 여겨
향기를 더해주고 이를 묵향(墨香)이라 부른 것이지요.
벼루가 없으면 먹은 온전히 제 향기를 드러내지 못할 것이며
먹이 없다면 벼루는 차가운 돌덩이에 불과할 것입니다.
다른 이를 용인하며 자신을 양보할 줄 아는
벼루와 먹의 관계가 어찌 여기에만 있겠습니까?
산다는 것은 모두 이렇게 서로가 의탁하고 의지하며
서로를 빛내주는 것이 아닐까요 ?
묵은 벼루를 잘 씻어 조용히 먹을 갈아 봅니다.
향기를 절로 은근하고 마음은 점차 평안해 집니다.
벼루의 미학입니다.
글·그림｜김상철 미술칼럼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