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받은 편지
글·그림 | 김상철 미술칼럼
형! 잘 지내시지요?
봄이라고 하지만 아직 찬 밤공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저는 작업실 베란다에서 어둠 속에 시커멓게 버티고 선 앞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 작업실은 널찍한 작업 공간에 공기도 좋고 방해받을 이웃도 없어 참 쾌적합니다.
형께서도 평생을 꿈꾸시던 그런 작업실이 아마 이런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고 보니 바쁘다는 핑계로 초대 한 번 제대로 못 한 것 같습니다.
갑자기 형 생각이 난 것은 벌써 몇 달 전부터입니다.
사실 그동안은 소위 잘 나간다는 작가 행세를 하느라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날마다 밀려드는 주문에 시간을 맞추느라 작업이 아닌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화랑주인의 요구에 맞춰 예쁜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전시장에 작품을 걸기만 하면 빨간 딱지가 붙곤 했었지요.
그렇다고 그림 판 돈들이 모두 제 돈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나름 돈도 좀 벌고 작업실도 마련했으니 출세를 한 셈이지요.
그동안 형들 사이에서 구석에 앉아 소주나 얻어 마시던 제가
화랑주인이나 컬렉터라는 아주머니들과 우아하게 와인이나 양주를 마시게 되니
저는 제가 마침내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된 것인 줄 착각도 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갑자기 경제상황이 안 좋아졌다고 합니다.
뻔질나게 연락하고 찾아오던 화랑 주인들은 얼굴 본 지도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화가를 무슨 연예인 보듯이 구경 오던 아줌마들도 이제는 발걸음을 끊었습니다.
여전히 그림을 그리지만 습관처럼 그림이 자꾸 예뻐지기만 합니다.
또 그렇게 그려놔도 찾는 사람이 없으니
내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닌 이상한 그림들만 쌓여가게 되네요.
멋으로 마시던 와인이나 양주보다는 역시 쓴 소주가 낫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도
이제는 마땅히 더불어 마시고 취할 사람조차 없네요.
실은 초저녁부터 혼자 소주잔을 비웠지만 도무지 취하지도 않습니다.
찾는 이 없어 조용하고 한적하던 이곳이 이제는 무섭기까지 합니다.
저는 어쩌면 속성으로 키워진 상추나 콩나물이 아니었나 싶어 두렵습니다.
저는 스스로 자란 것이 아니라 키워진 것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저는 이 봄 날씨가 추운 것이 아니라 수상한 이 세태가 두렵고 무서울 따름입니다.
제가 성취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서릿발처럼 차갑게 저를 옭죄어옵니다.
풍광 좋던 이 베란다가 갑자기 낭떠러지 끝처럼 느껴지네요.
담배연기가 눈에 들어갔는지 눈물이 나네요.
새삼 인간은 모름지기 겨울을 나 봐야 한다고 충고했던 형 생각이 절실하네요.
한 번 불러 주신다면 다시 한 번 아무 것도 없이 배고프고 힘들었지만
적어도 넋이라도 총총히 살아있던 그 옛날 그 후배로 다시 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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